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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골든아워 (1) 부아아아앙.
매끈하게 빠진 차체를 자랑하며 한 대의 스포츠카가 도로를 달리는 중이었다.
편도 2차선의 국도를 질주하는 차 안에선 어깨까지 오는 긴 머리가 탐스러운 여자가 핸즈프리로 전화를 걸고 있었다.
“아, 삼촌.” – 혜진이냐?
“예. 지금 올라가는 중이에요.” – 헛참. 안 그래도 바쁠 텐데, 왜 맨날 전화야? 설마 그 녀석 때문이냐?
“그 녀석이라뇨? 누굴 말씀하시는지 모르겠는데요?” – ······벌써 6년이나 지났는데. 너 혹시 고 녀석한테 마음 있는 거냐?
“그런 거 아니에요. 애들이 하도 궁금해하니까······.” – 누구라곤 말 안 했는데?
순간 멈칫했던 혜진이 딴소리를 늘어놓았다.
“아! 간만에 나오니까, 답답했던 속이 확 풀리는 거 있죠? 역시 스트레스는 참으면 안 되는 건가 봐요.” – 녀석하곤. 2박 3일로 출장 다녀오면서 그런 소리 하는 건 대한민국에 너 하나밖에 없을 거다. 후우. 다시 말하지만, 나도 그 녀석 소식 들은 지 1년이 넘어간다. 뭐, 그럴 일이 있을까 모르겠다만, 나중에라도 소식 듣게 되면 얘기해주마.
“아이참. 그런 거 아니라니까 그러네요. 아, 신호 바뀌었다. 이따가 들릴 수 있으면 들릴게요. 끊어요.” 전화를 끊은 뒤, 혜진은 한숨을 내쉬었다.
딱히 마음이 있는 건 아니지만, 궁금한 건 사실이었다.
물론 그녀보다 더 애타게 소식을 기다리는 사람은 두 사람. 그중에서도 특히 현수. 단지 궁금해한다는 말만으로는 부족할 정도로, 정말이지 틈만 나면 그의 얘기를 늘어놓는 현수에게 비할까냐 마는.
“차가운 성격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렇지.” 고개를 내저으며 핸들을 고쳐잡았다.
곽영준에게 했던 말은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대학원까지 모두 마치고 본사에 입사한 이후 단 하루도 긴장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하루하루가 고단함의 연속이었고, 어쩌다 참가하게 된 프로젝트는 그녀의 몸뿐 아니라 마음 역시 한계까지 몰아갔다.
그러다가 나온 출장.
막판에 그녀를 보좌해줄 김 부장이 갑작스러운 외국 바이어의 방문으로 빠지게 되면서 혼자 떠나게 된 터였다.
그래서 더 홀가분한 마음으로 다녀올 수 있었다.
“학술대회도 오늘로 끝나는 건가?” 평소 삼촌이라고 부르며 친하게 지내고 있는 곽영준을 머리에 떠올린 그녀는 말뿐만이 아니라 진짜로 가는 길에 들렀다가 갈까 심각하게 고민하는 중이었다.
어쩌면 그 사람의 소식을 들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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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에 위치한 K 빌딩.
1986년 런던에서 처음으로 개최된 이래 아시아에선 다섯 번째로 열리는 세계응급의학회 학술대회(ICEM)가 이곳에서 개최 중이었다.
올해로 20회를 맞아 국제응급의학연맹이 주최하고 대한응급의학회가 주관하는 ICEM에는 세계 70개국 3,000여 명의 응급의학 분야 종사자들이 모여들었다.
‘Collaboration(협업), Professionalism(전문성), Responsibility(책임)’ 이라는 문구가 선명하게 박혀 있는 포스터가 회장으로 향하는 길목 곳곳에 붙어 있었다.
“······브라질 포르투 알레그리 PUCRS 병원에서 오신 아이어톤 카발로 박사님의 발표가 있겠습니다.” 연이어 명사의 강연이 또다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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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길 몇 차례.
“다음은 한국 한서 종합병원의 곽영준 박사님이십니다.” 우레와 같은 박수가 울려 퍼지고, 연단에 선 곽영준이 객석을 한차례 둘러보고는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한서 종합병원의 응급센터장을 맡고 있는 곽영준입니다.” 강연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회장은 이내 달아올랐다.
지난 20년간 현장에서 뛰며 손에 박히듯 환자들의 고통까지 모두 떠안은 한 의사의 열망이 모두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다.
“이것이 닥터헬기 출동 의사 인력 증원이 시급한 이유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헬기 한 대를 움직이는 데에 필요한 인원은 5명인데······.” 쉴 새 없이 흘러나오는 얘기에는 그간의 경험이 짙게 배어 있었고, 때때로 아쉬움을 토로하는 그의 표정은 다른 이들에게 안타까움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마지막으로, 부족한 식견임에도 끝까지 들어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짝짝짝짝.
박수가 터지고.
정중히 고개를 숙여 보인 곽영준이 연단에서 물러났다.
그 후로도 수많은 이들의 발표가 이어졌다.
“······이것으로 심포지엄을 마치겠습니다.” 오전의 런천 심포지엄이 끝난 후에도 주최 측이 준비한 여러 프로그램이 이어졌고, 특히 고압산소치료와 고압산소챔버에 대해 폭넓게 논의되었다.
그렇게 한 시간여가 더 지난 후에야 마지막 날의 행사까지 모두 끝났다.
3일간 치러진 학술대회가 끝나자, 행사에 참여했던 이들이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돌아가기 시작했다.파워볼실시간
행사장에서 빠져나오던 곽영준의 앞을 은발의 장년 남자가 가로막은 것도 그때였다.
“닥터 곽! 지금 가는 건가?” 어딘지 모르게 악양이 강하게 느껴지는 영어를 구사하는 남자. 턱밑까지 덮은 잿빛의 수염이 멋들어진 이탈리아계 미국인 로베르토였다.
“끝났으니 가봐야지. 회의만 주구장창 한다고 환자들을 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래도 소기의 성과는 있었지 않은가?” 국제적인 협력하에 소외지역의 응급환자들을 구할 시스템의 마련을 두고 하는 얘기일 터다.
“고무적인 일이긴 하지.” 그렇긴 하지만, 곽영준의 입장에선 눈앞에 놓인 사안들이 더욱 중요했다.
언젠가 그가 한 신문사와의 인터뷰에서 말한 것처럼 ‘처참하기 짝이 없는’ 응급센터의 현실. 한시가 급하다 못해 조금의 실수만으로도 천금 같은 목숨이 날아가 버리는 상황에서 인적·물적 자원이 모자라 손 한 번 제대로 못 쓰고 환자를 포기할 수밖에 없는 현 상황을 개선하지 못한다면 이렇게 학회에 참가해 백날 떠들어봐야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허허, 거참. 여전하구먼.” “세상이 여전한데 나만 바뀐다고 되겠나?” “쯧, 그래. 그 마음 내가 잘 알지. 그건 그렇고. 소식은 들었나?” 로베르토의 질문에 곽영준은 무슨? 하는 얼굴 해 보였다.
그러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내젓는다.
“하여간 스승이나 제자나······. 브랜든한테서 연락이 왔는데, NGO 쪽 일정이 마무리되었다더군.” “아!”
그제야 눈을 동그랗게 뜨는 곽영준. 그가 이내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생각만으로도 흐뭇하다는 얼굴.
그 모습에 로베르토가 못 말리겠다는 눈빛을 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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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더니 불쑥 물었다.
“그럼, 이제 돌아오는 건가?” “글쎄.”
“뭔 대답이 그런가?” “그 녀석 마음이겠지.” “헛참. 자네들···. 두 사람은 정말이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군, 그래.” 로베르토가 고개를 내젓고 있었지만, 곽영준은 한층 짙어진 미소만 짓고 있을 뿐이었다.


이제는 돌아가야 할 시간.
그렇게 생각하니, 한국을 떠나오던 날이 떠오른다.
마지막으로 본 곽영준 교수님의 모습도.
들었던 모든 말을 믿었던 것은 아니었는데, 그 약속들이 어떤 의미였는지는 미국에서 와서야 비로소 알 수 있었다.
곽영준 교수님은 내게 했던 얘기를 철저하게 지키려 노력하셨고, 그 덕분에 손쉽게 미국에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애당초 교수님의 추천서가 없었으면 입학조차 못 했을 것은 물론이고, 다른 교수님들께 부탁해 다섯 개나 되는 추천서를 받아주신 것도 그분이셨다.
클럭십(Clerkship)은커녕 아는 사람 한 명 없는 이국땅에서 그것은 말 그대로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실시간파워볼
그때 그러면서 곽영준 교수님이 하신 말씀은 미국에 있는 내내 절절히 통감할 수 있었다.
“학맥과 인맥으로 얼룩진 국내보단 차라리 실력으로 승부를 볼 수 있는 미국이 나을 걸세. 물론 인종차별은 어쩔 수 없겠지만, 자네라면 충분히 극복할 수 있을 거라 믿네.” 그렇게 해서 입학한 학교는 존 홉킨스 대학.
그곳에서 5년을 보냈고, USMLE STEP 3까지 통과해 마침내 당국에서 공인하는 의사 면허를 손에 쥐었다.
애초 예상했던 것보다 1년은 늦은 셈이지만······.
물론 좀 더 빨리 따려면 딸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은 까닭은 다름이 아니다.
굳이 말하면······.
그럴 필요가 없어서였다.
미국에서도 사건·사고는 끊임없이 일어났고, 그럴 때마다 카르마 지수는 계속해서 낮아졌으니까.
USMLE STEP 3까지 통과한 후 바로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시리아로 넘어온 것도 그 때문이었다.
“헤이, 강! 짐 다 챙겼어?” 나도 키가 작은 편이 아닌데, 나보다 한 뼘은 더 큰 흑인 남성. 루카스가 살갑게 물어오고 있다.
“지금 막 끝났어.” “그래? 그럼 맥주 한잔할까?” “글쎄, 그러다 레이첼에게 걸리면 뼈도 못 추릴 텐데?” “뭐 어때서? NGO 활동도 어제부로 끝났고, 이제 돌아가기만 하면······. 아 참. 넌 고국으로 간다고 했던가? 한국? 맞지?” 고개를 끄덕여주자, 그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거기 아직 전쟁 중이라며? 위험하지 않아?” “전혀.”
“흠, 그렇다고 해도······. 굳이 돌아갈 필요가 있나? 어렵사리 시험을 통과했는데······. 미국에서 팰로우 하는 게 낫지 않아? 너 정도 실력이면 3년 안에 조교수 정도는 충분히 차지할 수 있잖아?” 누구나 할법한 생각이었다.
아니, 합리적인 사고를 지닌 미국인이라면 당연하게 여길 생각이다.
“그럴 수도 있겠지. 그렇긴 한데······.” 내가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루카스는 내 속뜻을 알아챘는지 서둘러 치고 들어왔다.
“그리고 네가 가고 나면 우린 어떻게 하라고? 여기서도 그래. 이제야 말이지만, 내가 의대에서 배운 것보다 여기서 너랑 같이 지내면서 본 것들이 더······.” 말을 하다말고 한숨을 내쉬는 루카스. 그를 보는 내 표정을 읽은 걸 테지.
“미안.”
“하아. 대체 이유가 뭔데? 네가 죽고 싶어서 안달 난 놈처럼 때와 장소도 가리지 않고 메스를 휘둘러대는 건 그렇다 치자고. 그거야 네게도 무언가 사정이 있을 테니까. 하지만, 이건 정말 아니잖아? 병원 측에서 제안한 자리가 어떤 의미인지 정말 모르는 거야? 아니면 그보다 더한 제안이라도 받은 거냐고?”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그가 품은 속정이 느껴져서.
그렇기에 여태껏 누구에게도 하지 않은 얘기를 해주었다.
“이젠 내가 약속을 지킬 차례거든.” “응? 약속?” 궁금하다는 눈빛이 되는 루카스를 뒤로하고 돌아섰다.
피식.
“그런 게 있어.” 손을 흔들며 덧붙였다.
“비행기 시간에 늦지 않으려면 슬슬 가봐야겠다. 맥주는 다음 기회에 하자고.” “어? 강! 이대로 간다고? 정말? 그래도 브랜든은 만나고 가야 하는 거 아냐?” “이미 보고했어. 그럼, 나 간다.” “헤이! 레이첼은 어쩌고? 너 이대로 돌아간 거 알면 걔가 가만 안 있을 건데······.” 뒤쪽에서 루카스가 어이없다는 듯 소리치는 게 들려왔지만, 깔끔히 무시했다.
대신 때마침 지나가는 차량을 보곤 달려들었다.
“공항 가는 거지? 나 좀 거기까지 태워줄 수 있어?” “오케이! 타!” 보조석으로 짐을 구기듯 던지며 뛰어올랐다.
차량 옆면에는 NGO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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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오오오오오.
이륙과 동시에 귀로 흘러드는 소리.

다리를 펴기엔 너무 좁은 좌석에 앉아 창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언제나 보아오던 하늘이지만, 새삼스럽다.
이계에서 돌아왔을 때와는 다른 감성. 그곳에서의 고향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쉽게 올 수 없는 곳이었다면, 지금은 비행기 한 번만 타면 언제든 갈 수 있는 곳이 서울이라는 도시였으니까.
그렇다고 해서 그리웠냐 하면 그건 또 아니다.
늘 그렇듯, 장소가 그리운 게 아니라······.
사람이 그리운 것이니까.

ㅋㅋㅋ 파티 어마무시하게 준비했으니까, 딱 기대하고 있어! 아마 보면 깜짝 놀랄걸?
현수 녀석에게서 온 메시지를 확인하곤 웃고 말았다.
대체 뭘 어떻게 준비를 했기에 놀라네 마네 하는 건지.
진짜 놀라운 건 따로 있으면서.
설마하니 지연과 아직까지도 사귀고 있을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달까.
그러면서도 둘 다 결혼 얘기의 ㄱ자도 꺼내지 않는 걸 보면 정말이지······.
무슨 생각들인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핸드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러곤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내어 펼쳤다.
인천까지 가는 동안 그간 모아둔 자료들을 정리하기 위해서였다.
부스럭.
그리고 노트북과 함께 꺼낸 사탕의 껍질을 벗기려는데······.
옆자리에서 뜨거운 시선이 느껴져 바라보니, 앙증맞을 정도로 눈이 동그란 소녀가 날 바라보고 있다.
스윽.
사탕을 한쪽으로 움직이니 소녀의 눈동자가 움직인다.
스윽.
다시금 따라오는 눈길.
웃음이 났다.
하지만, 아이가 민망해할까 봐 내색하지 않고 말했다.실시간파워볼
사탕을 내밀면서.
“혹시 블루베리 알러지 있니?” “아뇨.”
“그럼 먹을래?” 소녀는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엄마로 보이는 여성을 바라본다.
머리칼이 금발로 찰랑거리는 여성이 내 쪽을 한차례 흘깃거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고사리처럼 작은 손을 뻗어 사탕을 받아드는 소녀였다.
“비행기 안에선 게임 하지 말랬는데.” 사탕을 오물거리며 말하는 아이를 보며 다시 한번 미소를 머금었다. “노트북은 괜찮아.” “에? 그런 거예요?” “이륙했으니까, 이제 곧 핸드폰으로도 게임 할 수 있을걸?” “정말요?” ···하고 물었던 소녀였지만, 이내 풀죽은 표정을 해 보인다.
그러더니 엄마의 눈치를 보며 작게 얘기했다.
“그치만, 엄마가 주지 않을 거예요.” 아이답지 않게 쓸쓸한 목소리로 말하던 소녀는 들고 있던 스케치북에 연필을 쓱싹거렸다.


그 모습을 보다가 물었다.
“내가 재밌는 거 보여줄까?” 금세 눈을 반짝이는 소녀.
기대감이 가득한 눈빛이 되어 고개를 끄덕인다.
손을 내밀었다.파워볼게임
“그거 줘볼래?” 이거요? 하는 눈으로 바라보는 소녀에게서 스케치북을 받아들었다.
슥슥.
그러곤 연필로 선을 그으며 얘기했다.
“여기 연못이 있고,” 슥슥.
“주위에는 수풀이 있어.” 슥슥슥.
선들이 모여 윤곽을 이루고, 그 윤곽이 점차 선명해져 화폭의 한구석에서 그림이 되어가자, 소녀가 안 그래도 큰 눈을 한껏 치켜뜨며 놀라워했다.
“와! 진짜 잘 그린다! 엄마, 엄마! 이 아저씨, 미첼보다도 더 잘 그리는 거 같아!” 미첼이 누군지는 모르겠으나, 깜찍하게 외치며 즐거워하는 소녀를 보니 내가 다 흐뭇해진다.
“그렇게 얘기해줘서 고마워.” “웅. 사실이 그런걸요.”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로 물었다.
“우리 계속할까?” “응.”
“자, 이 연못에는 뭐가 있을까?” “음······. 오리?”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엄마 오리랑 아기 오리들이랑 이쯤에서 헤엄치겠네?” 점차 확장되며 화폭을 채워가는 그림들.
“와! 귀엽다.” 아이의 솔직한 탄성이 자극했는지, 소녀의 엄마도 이쪽을 바라보다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어 보인다.
저런 표정은 가끔 보아온 터라, 못 본 척했다.
그러곤 계속해서 소녀와의 대화에 집중했다.
손으로는 그림을 그리면서.
“근데, 아기 오리들 중에 한 마리가 되게 개구쟁이인 거야.” “어! 엄마 말 안 듣고 저쪽으로 갔구나!” “그래도 걱정하지는 마. 여기 엄마 오리가 이렇게······.” 스스슥.
연필을 놀리자, 소녀가 앙증맞게 작은 손으로 박수까지 치며 좋아라 한다.
“엄마는 이미 알고 있는 거구나! 헤헤헤.” “이제 안심돼?” “응! 엄마 오리가 지켜보고 있으니까, 아기 오리는 괜찮을 거야. 그치 엄마?” 신바람이 나서 종알종알 떠들어대고 있었지만, 기내에 있는 사람들 중에 소녀를 꾸짖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통로를 지나가던 스튜어디스 조차도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소녀가 홱 하고 고개를 돌리며 물어온 것도 그때였다.
“근데요. 아저씨는 화가예요?” 옅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곤 대답해주었다.
“아니. 의사.” 소녀는 뭔가 이해가 안 가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의사라면서 왜 이렇게 그림을 잘 그려요?” “엘리스, 그런 말 하는 거 아냐. 실례잖니?” “그치만······. 미첼 선생님이 엄청 큰 상을 받았다고 했는데, 그 선생님보다도 훨씬 잘 그리는걸?” 손을 뻗어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러곤 얘기했다.
“그럼, 난······. 그림 잘 그리는 의사인가 보지.” ***
시리아에서 두바이를 거쳐 인천에 도착한 후, 빠져나온 입국장.
오랜만에 찾은 한국은 바뀐 게 없어 보였다.
물론 자세히 보면 크고 작은 것들이 달라지긴 했겠지만.
그렇다 해도 내가 느끼는 공기는 그대로였다.
캐리어를 끌고 공항을 벗어났다.
그러곤 주위를 한차례 둘러보았다.
공항버스를 탈까?
잠시 고민했지만, 그냥 택시를 타기로 했다.
잠깐 떠나 있었다고 왠지 어색하기도 했고.
사실상 길도 잘 모르니까.
괜히 헤매느니, 돈 좀 들더라도 그편이 낫겠다 싶었다.
차례를 기다려 택시에 오른 뒤 말했다.
“장충동······. 한서 종합병원이요.” 목적지를 들은 운전기사 아저씨가 능숙한 솜씨로 핸들을 꺾는 걸 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하늘은 유난히도 푸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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